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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FS — IRON EAGLES
PIGEON / HOLLOW
LOS ANGELES AFB, CA
The Power of the Dog (2021)
312호의 수요일 밤. 세르게이의 낡은 소니 노트북이 침대 위 이불 언덕 위에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액정은 15인치, 해상도는 형편없었고, 스피커는 저음이 뭉개졌다. 그러나 이것이 세르게이의 방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TV는 공용 데이룸에만 있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은폐 매뉴얼 위반이었으니까.
세르게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있었다. 검은 티셔츠와 회색 트렁크. 무릎 위에는 도리토스 봉지가 놓여 있었고, 협탁 위에는 콜라 두 캔과 보드카 반 병이 세워져 있었다. 네이선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네이선이 노트북에 DVD를 밀어 넣었다. 렌즈가 웅, 하고 회전했다. 로딩 화면.
Sergei
What are we watching again? (뭐 본다고?)
도리토스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이미 세 번째 확인이었다. 세르게이는 영화 제목을 외우는 데 관심이 없었다.
Nathan
The Power of the Dog. (파워 오브 도그.)
Sergei
⋯About dogs? (⋯개 얘기야?)
진지하게 물었다. 녹안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만약 개 얘기라면 세르게이는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개는 세르게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종이었다. 고양이와 달리.
Nathan
No. It's a western. Kind of. Directed by Jane Campion. (아니. 서부극이야. 비슷한. 제인 캠피온 감독.)
Sergei
Chick director? (여자 감독?)
미간을 좁혔다. 도리토스를 씹으면서. 세르게이의 편견 시스템이 즉시 작동했다.
Nathan
Just watch it, Sergei. (그냥 봐, 세르게이.)
네이선의 목소리에 미세한 피로가 실려 있었다. 이 인간을 데리고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학습한 자의 피로.

1막: 첫 30분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고, 몬태나의 광활한 풍경이 화면을 채웠다. 조니 그린우드의 불협화음적인 스코어가 스피커의 뭉개진 저음으로 흘러나왔다.
세르게이는 처음 5분간 조용히 감상했다. 왜냐하면 카우보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광활한 서부의 풍경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세르게이가 인정하는 요소들이었다.
그리고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화면에 등장했다. 필 버뱅크. 진흙이 묻은 손, 담배, 카우보이 모자, 채찍.
Sergei
He's kinda hot. (좀 잘생겼네.)
자연스럽게 뱉었다. 도리토스를 씹으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이 이미 네이선 앞에서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자의 발언.
Nathan
⋯.
네이선의 벽안이 세르게이를 잠깐 보았다가 화면으로 돌아갔다. 반응 없음. 그러나 입가에 미세한 곡선.
화면 속에서 필 버뱅크가 동생 조지를 조롱했다. ‘뚱보’라고. 조지를 도발하며. 카우보이 무리 앞에서 창피를 주며. 세르게이의 자세가 미묘하게 변했다. 어깨가 살짝 굳었다. 도리토스를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Sergei
⋯He's kinda a dick. (⋯좀 개새끼네.)
중립적으로 관찰했다. 방금 5분 전에 ‘잘생겼다’고 판정한 인물에 대한 재평가.
Nathan
Mm. (음.)
네이선의 짧은 대답. 세르게이는 그 대답의 톤에 미세한 함정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나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다.

2막: 로즈와 피터의 등장
로즈가 등장했다. 미망인. 피아노를 치는. 그리고 그녀의 아들 피터, 마르고, 여성스럽고, 종이꽃을 만드는 소년.
필이 피터를 조롱했다. 종이꽃을 라이터로 태우며. 카우보이들의 웃음소리 사이에서. 피터의 얼굴이 굳었다.
세르게이의 도리토스 봉지가 정지했다.
Sergei
⋯Okay, that's fucked up. (⋯아니 이건 좀 심하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지하게. 세르게이는 자신의 모순을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이 매일 자말과 래리 진에게 하는 짓과 필이 피터에게 하는 짓이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화면 안에서 그것을 보는 것은 다른 감각이었다. 세르게이는 필이 하는 짓을 ‘개새끼짓’이라고 정확하게 판정했다.
Nathan
⋯.
네이선의 벽안이 다시 세르게이를 흘긋 보았다. 커피 컵을 입술 근처에 든 채. 무언가 말하려다가 삼켰다. 그리고 그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르게이는 그 시선을 감지했다. 미간을 좁혔다.
Sergei
What. (뭐.)
Nathan
Nothing. (아무것도 아니야.)
Sergei
You looked at me weird. (이상하게 봤잖아.)
Nathan
Watch the movie, Sergei. (영화나 봐, 세르게이.)
세르게이는 잠시 네이선을 노려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리토스를 한 움큼 더 입에 털어 넣었다.

3막: 브롱코 헨리
영화가 진행되며 필의 과거가 드러났다. 브롱코 헨리. 필의 스승이자, 필의 우상. 그리고 필의 숨겨진 사랑. 필이 헛간에서 브롱코 헨리의 안장에 얼굴을 묻는 장면. 필이 강가에서 혼자 나체로 목욕하며 손수건을 얼굴에 대는 장면.
세르게이의 자세가 다시 변했다. 도리토스 봉지가 이불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녹안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Sergei
⋯Oh. (⋯아.)
짧은 감탄. 뭔가를 이해했다는 소리.
Sergei
He's⋯ (걔⋯)
문장이 끝나지 못했다.
Nathan
Yeah. (응.)
네이선의 대답. 세르게이가 방금 무엇을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자의 확인.
세르게이는 잠시 침묵했다. 노트북 화면 속 필 버뱅크가 몬태나의 강물 속에서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있었다. B.H.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손수건. 세르게이의 녹안이 그 장면을 응시했다. 도리토스는 더 이상 씹지 않았다.
Sergei
⋯Fuck. (⋯씨발.)
낮게 중얼거렸다.
Nathan
What. (왜.)
Sergei
That's⋯ (그건⋯)
세르게이가 말을 골랐다. 자신의 어휘력이 이 순간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한 표정으로. 손을 얼굴 근처에서 어색하게 흔들었다. 은회색 머리카락을 한 번 헝클었다.
Sergei
That's 1925 in Montana, Nathan. (저건 1925년 몬태나야, 네이선.)
진지하게 말했다. 마치 그 사실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듯이. 사실 모든 것을 설명했다.
Nathan
I know. (알아.)
네이선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세르게이는 그 조용함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을 파고들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4막: 필과 피터
영화 후반부. 필이 피터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롱으로. 그러나 점차 밧줄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며. 담배를 나누며. 말을 타는 법을 가르치며. 필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피터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세르게이는 이 지점에서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Sergei
⋯Wait. Wait wait wait. Is he into the kid now?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얘 지금 그 애한테 관심 있는 거야?)
미간을 좁히며. 진짜로 헷갈리는 표정으로.
Nathan
It's complicated. (복잡해.)
Sergei
Nathan, he was mean to the kid twenty minutes ago. He burned his flowers. (네이선, 얘 20분 전에 그 애한테 못되게 굴었어. 종이꽃 태웠잖아.)
Nathan
⋯.
네이선의 벽안이 세르게이를 매우, 매우 천천히 응시했다.
세르게이는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필 버뱅크의 서사를 완전히 외부에서 관찰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난 몇 주간 콜과 자말과 래리 진에게 한 행동들을 필의 서사에 겹쳐 볼 뇌의 회로가 아직 작동하지 않았다.
Nathan
Sometimes people are mean to the ones they‘re drawn to. Because they don’t know what to do with it. (가끔 사람들은 자기가 끌리는 대상한테 못되게 굴어.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네이선의 목소리가 여전히 조용했다.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세르게이를 보지 않고. 커피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로.
세르게이의 도리토스 씹는 소리가 정지했다.
3초의 침묵.
세르게이의 녹안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움직여 네이선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은회색 눈썹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뭔가 방금 자신에 대한 진술이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뇌 속에서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Sergei
⋯Are you talking about me. (⋯나 얘기하는 거야?)
낮게. 방어적으로.
Nathan
I'm talking about the movie, Sergei. (영화 얘기야, 세르게이.)
네이선의 얼굴은 여전히 화면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입가의 곡선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세르게이는 잠시 네이선을 노려보았다. 도리토스 봉지를 다시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시끄럽게 씹었다. 방어적으로. 그러나 뇌 어딘가에서 그 문장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가끔 사람들은 자기가 끌리는 대상한테 못되게 굴어.’ 세르게이는 그 문장을 처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나중에 다이어리에 적을 때 처리하기로.

5막: 결말
영화가 끝났다. 피터가 필을 죽였다. 탄저병에 감염된 소가죽을 밧줄로 만들게 한 뒤. 조용히. 우아하게. 여성스러운 소년이 마초 카우보이를 살해했다. 시편 22편의 구절이 화면에 떴다.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가 마지막으로 웅웅거리다가 사라졌다.
312호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노트북의 팬 돌아가는 소리와 스피커의 미세한 화이트 노이즈만 남았다.
세르게이는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리토스 봉지를 든 채로. 씹지 않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검은 배경 위에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되어 보였다. 은회색 머리카락과 녹안이.
Sergei
⋯The kid killed him. (⋯그 애가 죽였어.)
낮게 중얼거렸다. 아직 처리 중인 뇌의 소리로.
Nathan
Yeah. (응.)
Sergei
The soft one killed the tough one. (부드러운 애가 강한 놈을 죽였어.)
Nathan
Yeah. (응.)
세르게이는 잠시 침묵했다. 도리토스 봉지를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은회색 머리카락을 한 번 헝클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왔다.
Sergei
⋯I don't know how I feel about that movie, Nathan. (⋯나 저 영화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어, 네이선.)
진지하게. 자신이 느끼는 것을 언어로 만들 능력이 부족한 자의 정직한 진술.
Nathan
That's the point. (그게 포인트야.)
세르게이의 손이 협탁 위의 보드카 병을 잡았다. 라벨이 반쯤 벗겨진 스미노프. 뚜껑을 돌려 열었다. 유리병 입구에서 알코올 특유의 날카로운 향이 올라왔다. 세르게이는 잔을 찾지 않았다. 그냥 병째로 한 모금 마셨다. 목젖이 움직였다. 눈썹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도수가 세다는 사실을 24년째 매번 새롭게 발견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병을 네이선 쪽으로 내밀었다.
Sergei
Here. You need this too. (자. 너도 필요할 거야.)
네이선이 병을 받았다. 손가락이 세르게이의 손가락에 잠깐 스쳤다. 우연이 아니었다. 세르게이는 병을 놓기 전에 0.5초 정도 손을 놓지 않았고, 네이선의 검지 마디를 자신의 엄지로 잠깐 눌렀다. 아주 짧게. 마치 확인하듯이. ‘너 여기 있지’라는 신호처럼.
네이선은 병째로 한 모금 마셨다. 정확하게 세르게이가 마셨던 그 자리에 입술을 대고. 세르게이의 녹안이 그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이선이 병을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노트북의 크레딧은 이미 끝났고, 검은 화면 위에 DVD 메인 메뉴가 다시 떴다.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가 무한 루프로 낮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 중 아무도 노트북을 끄지 않았다.
Sergei
Nathan. (네이선.)
세르게이가 벽에서 등을 떼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네이선을 마주 보았다. 무릎을 접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눈 위로 흘러내렸고, 녹안이 그 아래에서 낮은 광도로 반짝였다.
Nathan
Mm. (음.)
네이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옆모습으로. 세르게이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곧바로 마주 보지 않았다. 이것은 네이선의 습관이었다. 세르게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그가 먼저 시선을 주면 세르게이가 물러선다는 사실을 학습한 자의 전략.
Sergei
That thing you said earlier. (아까 네가 한 말.)
Nathan
Which one. (어떤 거.)
Sergei
‘Sometimes people are mean to the ones they’re drawn to.‘ (’가끔 사람들은 자기가 끌리는 대상한테 못되게 굴어.')
세르게이가 문장을 정확하게 재현했다. 억양까지. 네이선의 목소리 톤을 흉내내는 것에 가까운 정확도로. 그것이 세르게이가 그 문장을 뇌 속에서 몇 번이나 재생했는지를 증명했다.
네이선의 벽안이 마침내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졌다. 세르게이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침대 옆 스탠드의 노란 조명 아래에서.
Nathan
What about it. (그게 왜.)
Sergei
Were you talking about me and Jamal? Or me and Larry? Or. (그거 나랑 자말 얘기였어? 아니면 나랑 래리? 아니면.)
세르게이가 말을 잘랐다. 자신의 목록에서 마지막 이름을 뱉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네이선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네이선에게도 지난 몇 주간 못되게 굴었던 순간들이 뇌 속에서 갑자기 카탈로그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격납고에서 어깨로 밀친 일. 훈련 중 무전으로 조롱한 일. 시뮬레이션에서 일부러 편대 대형을 흐트러뜨린 일. 처음 만난 날 네이선의 하얀 피부와 뉴잉글랜드 억양을 두고 ‘동부 도련님’이라 부른 일.
그 카탈로그가 예상보다 길었다.
Sergei
⋯Or me and you. (⋯아니면 나랑 너.)
낮게 마무리했다. 문장을 밖으로 뱉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웠던 자의 목소리로.
Nathan
⋯.
네이선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벽안이 세르게이의 녹안을 응시했다. 조용히.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에 가까운 시선으로. 세르게이의 은회색 머리카락 아래에서 이마의 근육이 미세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을 벽안이 포착했다.
Nathan
I was talking about the movie, Sergei. (영화 얘기였어, 세르게이.)
네이선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안에는 유예가 있었다. 완전한 부정이 아닌.
Nathan
But you can read it however you need to. (근데 필요한 대로 해석해도 돼.)
세르게이의 얼굴이 미세하게 무너졌다. 반박할 수 없는 종류의 문장 앞에서. 이것은 네이선의 특기였다. 세르게이를 몰아붙이지 않으면서, 세르게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언어의 사용. 세르게이는 이 언어의 정확성에 매번 무장 해제되었다.
세르게이가 손을 뻗어 네이선의 손목을 잡았다. 세게가 아니라. 그냥, 감쌌다. 손가락으로 맥박을 확인하듯이. 네이선의 손목에서 뛰는 안정된 리듬을 확인하고 싶은 자의 몸짓으로.
Sergei
I have been. (나 그래왔어.)
짧게 인정했다.
Sergei
Mean. To you. Even after we started this. (못되게. 너한테. 이거 시작한 이후에도.)
‘이거’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세르게이는 아직 두 사람의 관계에 이름을 붙일 어휘를 확보하지 못했다. ‘연애’는 여자와 하는 것이었고, ‘섹스’는 여자와 하는 것이었고, ‘사랑’은 특히 여자와 하는 것이었다. 세르게이의 어휘 사전에는 24년간 이 상황을 위한 단어가 저장되지 않았다.
Nathan
I know. (알아.)
네이선의 대답이 조용했다. 자신도 이미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확인.
Sergei
Why do you⋯ (근데 왜 넌⋯)
문장이 다시 끊겼다. 세르게이가 은회색 머리카락을 한 번 헝클었다. 손이 다시 네이선의 손목 위로 돌아왔다.
Sergei
Why do you let me. (왜 그러게 두는 거야.)
이 질문을 하는 순간, 세르게이는 자신이 방금 노트북 화면 속의 필 버뱅크와 완전히 겹쳐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엔 뇌 속에서 처리되었다. 필터가 걸리지 않고. 정면으로.
세르게이의 녹안이 아래로 떨어졌다. 네이선의 손목을 잡은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눈 위로 다시 흘러내렸다. 이번엔 넘기지 않았다.
Nathan
Because I know why you do it. (네가 왜 그러는지 아니까.)
네이선의 목소리가 세르게이의 정수리 근처에서 조용히 떨어졌다. 세르게이의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그저 잡히게 두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Sergei
⋯Why do I do it. (⋯내가 왜 그러는데.)
세르게이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자신의 무의식을 네이선의 언어로 확인받고 싶은 자의 목소리로.
Nathan
Because you don‘t know what to do with wanting something you weren’t supposed to want. (원하면 안 된다고 배운 걸 원하게 됐으니까.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고.)
312호의 정적.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가 노트북 스피커에서 낮게 웅웅거렸다. 에어컨의 웅웅거림이 그것과 겹쳐졌다. 협탁 위의 보드카 병이 스탠드 조명을 받아 유리 위에 노란빛을 반사시켰다.
세르게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웃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울음도 아니었다. 몸이 어떤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몰라서 근육이 진동으로 대신 반응하는 종류의 떨림이었다.
Sergei
⋯Fuck. (⋯씨발.)
낮게 뱉었다.
Sergei
Nathan. (네이선.)
Nathan
Mm. (음.)
Sergei
Never say shit like that to me again. (다시는 나한테 그딴 소리 하지 마.)
고개를 들었다. 녹안이 벽안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진짜 위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상대가 자신을 너무 정확하게 관통했을 때, 그 정확함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자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Nathan
Okay. (알겠어.)
네이선의 대답이 짧았다. 그리고 그 짧음 안에는 ‘그러나 언제든 다시 말할 수 있다’는 유예가 있었다.
세르게이는 잠시 그 벽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예고 없이, 몸을 앞으로 던졌다. 네이선의 어깨 위에 이마를 박듯이. 무릎을 접은 자세 그대로. 손은 여전히 네이선의 손목을 잡은 채. 은회색 머리카락이 네이선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졌다.
Sergei
You're heavy. (너 무거워.)
세르게이가 네이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Nathan
You're the one leaning on me. (기대는 건 너잖아.)
Sergei
Shut up. (닥쳐.)
그러나 세르게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마를 네이선의 어깨에 더 깊이 눌렀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향수를 최소량만 뿌리는, 그를 정확하게 관찰하는 인간의 어깨에. 얼굴을 숨길 곳으로.
312호의 노란 조명 아래에서, 두 파일럿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로. 노트북에서는 파워 오브 도그의 메인 메뉴 스코어가 무한 루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어컨은 웅웅거렸다. 보드카 병은 반쯤 비어 있었다. 도리토스 봉지는 이불 위에서 잊혀진 채 서서히 눅눅해지고 있었다.
세르게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네이선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며. 은회색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녹안이 다시 정상 상태로 복귀했다. 감정 처리 완료. 셧다운 이후 재부팅.
Sergei
Okay. New rule. (좋아. 새 규칙.)
손가락으로 노트북을 가리켰다. 목소리에 다시 특유의 킬킬거림이 실렸다. 방금 5초 전의 감정 노출을 완전히 없던 일로 되돌리려는 자의 반사 반응으로.
Sergei
You don‘t get to pick movies anymore. Next time we’re watching Top Gun. (이제 네가 영화 고르지 마. 다음엔 탑건 볼 거야.)
Nathan
⋯.
네이선의 벽안이 세르게이를 응시했다. 반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쯤은 방금 세르게이가 자신을 어깨에 기댄 채 이마를 파묻었던 인간이 맞나 싶다는 표정으로.
Nathan
Top Gun is from 1986, Sergei. (탑건 1986년 영화야, 세르게이.)
Sergei
Exactly. Peak cinema. (그래. 영화의 정점이지.)
세르게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불 위에서 눅눅해진 도리토스 봉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시끄럽게 씹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어떤 감정 상태였는지에 대한 모든 물리적 증거를 저작 소음으로 덮어버리려는 자의 씹기.
Sergei
Val Kilmer in that volleyball scene, Nathan. That's art. (발 킬머 그 배구 신 봤어, 네이선. 그게 예술이야.)
진지하게. 도리토스 부스러기를 티셔츠 위에 흘리면서.
Nathan
⋯.
네이선의 벽안이 세르게이의 티셔츠 위에 떨어진 도리토스 부스러기를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세르게이의 얼굴로 올라왔다. 커피 컵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Nathan
Go to sleep, Sergei. (자, 세르게이.)
세르게이의 노트북에 손을 뻗어 화면을 닫았다. 파워 오브 도그의 메인 메뉴 스코어가 마침내 침묵했다. 312호에는 이제 에어컨의 웅웅거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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